조상근 / TRACE_순환의 경계와 존재의 기억
2026.04.21 – 2026.05.18








조상근 Cho Sang Geun
조상근 작가가 선보이는 《Trace》 연작은 단순히 아름다운 꽃의 형상을 재현하는 것을 넘어, 생명과 소멸, 그리고 그사이에 남겨진 ‘존재의 흔적’에 대한 성찰을 시각화한다.
작가는 물에 푼 흑연 가루를 붓에 머금어 종이 위에 형상을 쌓아 올린다. 이는 대상에 색을 입히는 일반적인 ‘채색’이 아니라, 시간과 물질이 겹겹이 쌓이는 ‘퇴적’의 과정이다. 흑백의 섬세한 층위로 구현된 꽃잎의 질감은 유려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이 먼지나 재처럼 이미 물질로 환원된 무언가임을 은연중에 암시한다. 화면 속 꽃은 살아 숨 쉬는 생명체라기보다 찬란했던 생명이 치열하게 머물다 지나간 자리 그 자체다.
단색조의 세밀한 꽃과 채도가 높고 평면적인 배경이 빚어내는 강렬한 대비는 화면 안에 기묘한 시각적 긴장감을 형성한다. 차분한 그레이 블루, 옅은 보라, 그리고 선명한 핑크빛 공간 속에서 무채색의 꽃들은 배경으로부터 떠오르는 것인지 심연 속으로 스러져가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모호한 경계에 놓여 있다. 형상은 특정한 공간을 물리적으로 점유하지 않고 허공을 부유하며 삶과 죽음이라는 경계를 허문다. 작가는 이 화면을 통해 이 형상이 생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인 화양연화(花樣年華)인지, 아니면 소멸을 앞둔 직전의 찰나인지 조용히 질문을 던진다.
작품 속 꽃의 자리에 ‘나’라는 존재를 세우는 순간, 화면은 단순한 정물화에서 지극히 개인적인 고백이자 사적인 초상으로 전환된다. 죽음 뒤 남겨질 나의 흔적을 상상하고 이를 흑연의 레이어로 묵묵히 기록해 낸 이 작업은, 언젠가 이 세상에 존재했던 모든 이들에게 바치는 헌사이기도 하다. 《Trace》는 흔적이자 곧 자취다. 캔버스 위에 겹겹이 쌓인 흑연의 층위는 결국 이곳에 머물렀던 누군가의 초상이며, 그 앞에 서는 순간 관람자는 자신도 모르게 피사체가 되어 내면과 존재의 궤적을 찬찬히 되짚어보게 된다.